[정회원 이야기] 자존심 대결

관** 2023-09-04 조회수 : 182

한국산림기술인회 이태익 정회원님께서 보내주신 원고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자존심 대결"

 

한국산림기술인회 정회원 이태익

 

 

오늘 아침에 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참을 나누며 소란이 일었다. 나는 어제 빵이 하나 모자란 것 때문이려니 짐작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제 오전이었다. 우리 팀의 기름돌이 우환이 비명을 질렀다. 오전 참 시간이 되어서 팀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데 하나가 모자랐던 것이다. 참을 챙기는 것은 자기 일이니 자기 몫이 하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환은 건너편 봉우리로 빵을 가지러 가려 했다.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갔을 것이다. 구름이라도 타고. 소란은 곧 끝났다. P 사장이 내게 걸어왔다.

 

“소장님, 오늘 우리 팀에 두 명이나 빠지는데 한 사람만 지원해 줄 수 없겠소?”

나에게 일감을 주는 사장의 부탁인데 어쩌랴. 나는 기름돌이 우환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기름돌이는 있으면 편하지만 없어도 크게 지장은 없었다. P 사장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안되고?”

우환이라는 말에 고마운 것이 아니라 못마땅한 표정이 P 사장의 얼굴을 잠깐 스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재선충 작업을 하고 있는 현장은 두 개의 봉우리가 당나귀 귀처럼 솟아있었다. 두 봉우리 사이는 깊은 계곡으로 갈라져서 아침에 산 아래서 헤어지면 서로 얼굴 한번 볼 수 없었다. 동쪽 봉우리는 우리 팀이, 서쪽은 P 사장이 직접 작업하였다. 우리는 매일 아침 산 아래서 그러니까 당나귀 이마쯤 되는 곳에서 참으로 지급되는 빵을 챙겨 각자의 봉우리로 올라갔다. P 사장은 자기 아들의 제과점에서 빵을 구입하여 한 사람당 두 개씩 지급했다.

 

“한국에서는 제일 고급 참일 것이다.”

아침에 빵을 나눌 때마다 P 사장이 하는 말이었다.

높은 산의 기후는 예측불허다. 점심시간이 되어갈 즈음이었다. 아침에 좋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며 소나기가 쏟아졌다. 상수리와 떡갈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조금 전까지 없던 구름이 배가 고파 몰려왔는지 까맣게 덮고 있다. 산속은 순식간에 점심시간이 아니라 저녁시간이 되어버렸다. 금방 갤 것 같지 않았다. 비가 그친다 해도 미끄러워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현장을 정리하고 내려가려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우환이었다.

“소장님, 꼭대기에서부터 잘라놓은 감염목을 모으고 있었는데, 비가 와서 둘러보니 나만 놔두고 모두 내려가버렸어요.”

우환의 눈물이 빗물과 함께 전화기를 타고 내렸다. 나는 짜증을 꿀꺽 삼킨 후 그에게 말했다.

 

“산길샘 앱에서 네가 있는 곳 좌표를 찍어서 내게 보내라.”

나는 팀원들에게 장비를 챙겨서 내려가라고 지시한 후, 우환을 데리러 건너편 봉우리를 향해 차를 몰았다. 상수리 나뭇잎 위에서 잘게 부서진 빗방울은 바람에 날려 춤을 추듯 숲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내 머릿속에는 의아한 생각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울음소리가 빗소리보다 더 크게 귓전을 맴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화를 냈을 것이다. 우환은 달랐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남자가 통곡을 하는 것이 의아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깟 빵 하나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도대체 P 사장은 왜 그랬을까? 점잖은 사람인데. 무엇보다 나는 왜 지금에서야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을까?

 

내가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우환은 타포린을 덮어쓰고 쪼그리고 있었다. 감염목을 훈증할 때 씌우는 비닐을 덮어쓴 자신이 마치 재선충에 감염이라도 된 것인 양 나를 보고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그에게 걸어갔다. 조금 전보다 비바람도 거세졌지만, 그의 울음소리는 훨씬 더 서러워졌다. 나는 그의 곁에서 울음이 먼저 그칠까 소나기가 먼저 그칠까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울음을 걷어내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P 사장에게 어제 빵 개수가 안 맞았다고 한마디 했어요. 그랬더니 성을 버럭 내면서 자기가 직접 세어서 나눠주었는데 그럴 리가 없다잖아요.”

“그랬다고 사람을 이 빗속에 버리고 가버린다는 말이야?”

“사실은, 나도 성이 나서 한마디 했거든요. 제과점에서 안 팔리는 빵을 우리가 사 먹는 거라고.”

그랬구나! P 사장이 자기 아들을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우환은 몰랐다. P 사장의 자존심(自尊心)은 아들자(子)를 쓴다. 子尊心.

 

타포린을 벗기고 우환에게 우산을 씌워 차로 데려갔다. 우리가 차로 돌아가는 동안 여기저기 베어놓고 쌓지 않은 감염목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우산을 걷었다.

“우환아! 우리 기분전환 좀 해볼까?”

우리는 훈증을 하기 위하여 1m 길이로 잘라둔 감염목을 계곡 아래로 던지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것은 한 토막도 남김없이 모조리 던져 내렸다. 계곡을 내려가서 건져 올리려면 힘깨나 써야 할 것이다. 유치한 복수를 끝내고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옷은 비와 땀으로, 마음은 통쾌한 기분으로 푹 젖어버렸다.

내려오는 차 안에서 내가 물었다.

“빵이 그렇게 맛있나?”

 

우환이 대답했다.

“애들이 빵을 좋아해서요. 큰 애는 열 살, 밑에는 여덟 살인데 내가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려요.”

“애들 엄마는 뭐 하시나?”

“작은 애 놓고 얼마 안 돼 도망갔어요.”

 

우환을 데리러 올라갈 때 품었던 의문은 풀렸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착잡했다. 우환은 산속에 홀로 남겨진 것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힘겨운 운명이 서러워 울었던 것이다. P 사장이 아니라 운명의 여신이 자기를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P 사장과 싸운 것은 빵 때문이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애들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눈빛은 우환의 삶을 지탱해 주는 희망의 등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절망적인 속박이기도 했다. 산에서 일하면 몸은 고되나 마음은 편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물건들, 욕망을 불러내는 자동차, 높은 아파트, 예쁜 옷 그리고 맛있는 식당이 산속에는 없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인간관계도 벗어날 수 있다. 산속에는 나무와 바람 소리, 은은한 향기 그리고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다. 가족. 오늘 두 사람이 다툰 것이 그 증거다.

 

우환은 복수를 같이해준 것이 고마웠던지 나에게 애들 엄마가 집을 나간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오늘 우환을 데리러 가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P 사장이 떠올랐다. 만약 P 사장이 우환의 개인사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슴속에서 열정이 모두 빠져나가고 빈자리에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혼란만 가득 찬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만 들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는 모두 당나귀 귀처럼 생긴 높다란 봉우리 위에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옆 봉우리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구름을 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귀만 살짝 기울이면 되는 것이 아닐까? 빗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와이프 사이로 멀리 제과점 불빛이 보였다. 나는 제과점 앞에 차를 세웠다. 그와는 지금까지 날씨 이야기 외에는 하지 않았던 나의 잘못을 빵으로라도 사죄하고 싶었다.

 

사진제공=한국산림기술인회 정회원 이태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