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원 이야기] 산재냐 공상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관** 2023-09-04 조회수 : 136

한국산림기술인회 이태익 정회원님께서 보내주신 원고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산재냐 공상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한국산림기술인회 정회원 이태익

 

 

울산에서 숲 가꾸기 작업을 할 때의 일이다. 우리 팀에서 기름돌이 일을 맡아보던 종석이가 잠시 고향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어머니가 넘어져 고관절을 다쳤다는데 내려가서 한번 보고 와야겠다는 것이다. 우리 팀은 앞톱과 뒷톱 다섯 개 조에 기름돌이 한 명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풀베기, 재선충, 어린나무 가꾸기 등등 산에서 일어나는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깔끔하게 완수해 내었다.

 

저마다 기술이 뛰어나고 관련 지식은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팀워크가 좋았다. 주어진 일을 마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일사불란하게 처리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후임자를 구하기 전에는 빠져나갈 수가 없었고 종석이가 어렵게 말을 꺼낸 지 며칠이 지난 후 인력 시장에서 적당한 사람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그는 아파트를 짓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기관지가 나빠져 공기 좋은 산에서 일해보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산일은 처음이지만 밑에서 하는 거랑 다를 게 뭐가 있겠느냐고 큰소리쳤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별 기술 없이 이것저것 시키는 일만 해온 사람에게는 다를 게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산에서 하는 작업의 종류는 수없이 많고 그에 따른 기술과 계획도 모두 다르다. 종석이가 돌아올 때까지만 있을 사람에게 그런 것을 설명해 줄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말했지만, 근무 조건이야 인력 시장을 통해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니 자기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길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실망한 것은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이는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물었다. 참과 점심은 어떻게 되는지, 퇴근 시간은 정확하게 지켜지는지, 자기의 권리에 관해서는 낱낱이 물어보았지만 해야 할 일에 관해서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기름돌이는 엔진톱으로 작업하는 톱사들에게 수시로 기름과 물을 갖다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 보직은 명칭에서 이미 짐작했겠지만, 하루 일당이 제일 낮았다. 종석이는 이런 위상의 일을 즐겁게 하는 희한한 사람이다. 그는 산 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저 아래 속세의 건설 현장과 산속의 일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아파트 건설 현장은 사람들이 살 콘크리트 숲을 짓지만, 산일은 나무들이 살 숲을 만드는 것이다.속세의 현장은 사람이 만든 일정에 따라 일을 하고 산속의 일은 자연이 허락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도시의 현장에서는 시계가 퇴근 시간을 정해주지만 산속에서는 하늘과 바람이 정해준다. 그러므로 이 풋내기가 궁금해하는 퇴근 시간을 정확히 알려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알게 될 것이다. 하늘과 바람이 하는 말을 해석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 풋내기에게 반드시 알려주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기름통을 어떻게 들고 다녀야 하는지는 제 마음대로지만 안전 문제는 반드시 내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경험 많은 톱사는 잠깐 방심할 때 사고가 나지만 풋내기들은 언제나 사고가 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러니 이것만 명심해라. 톱사들 뒤에 바짝 붙지 말고 그가 톱을 멈추고 돌아서서 부르면 그때 다가가야 한다.

 

한여름 작업은 힘이 들기 때문에 혹서기에는 새벽 일찍 일을 시작해서 12시 전에 끝낸다. 그늘이 있어 숲 가꾸기 작업이 풀베기보다야 낫지만, 눈을 찌르는 땀과 수시로 덤벼드는 벌은 가혹한 시련이다. 나는 벌에 쏘였을 때 먹는 약과 연고 그리고 지혈제를 항상 배낭 안에 넣어 다닌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다에 이르듯이 머리에서 흘러내린 땀이 발바닥에 질퍽하다. 여기가 산인지 바다인지 구분을 못 할 정도로 몽롱해지는 바로 그 순간 사고가 난다. 말벌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 쏘며, 잘린 나무가 쓰러지지 않고 공중으로 튀어 올라 톱사를 위협한다. 때로는 엔진톱이 직접 덤벼들기도 한다.

 

그때 나는 상수리나무 그늘에서 준공 일자까지 남은 일수를 세고 있었다. 전날 작업 후 회식 자리에서 사장님은 어떻게 하든 공기만 맞춰달라 했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으며, 바람 방향이 바뀐 것이 불안했다. 지금까지 남동쪽 계곡에서 올라오던 바람이 오늘은 북서쪽 능선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올지는 몰라도 비가 올 것이다. 햇볕이 내리쬐고 있지만, 그 안에 몸을 숨긴 음침하고 우울한 징후를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쉴 수는 있지만 일당은 없다. 무엇보다 공기를 맞추기 어렵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져 있을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으악! 하는 비명이 후텁지근한 대기를 찢으며 계곡을 타고 내려갔다.

 

비명을 듣자마자 즉시 배낭을 들고 급히 달려갔다. 풋내기의 왼쪽 무릎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톱이 무릎을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옷을 내려보니 10cm 가량 찢어진 곳에서 피가 솟아오르고 있었으며, 장엄한 초록의 바다에서 그것은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풋내기는 전신을 벌벌 떨었다. 나는 지혈한 후 상처를 조금 벌려보니 톱이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압톱이 나무를 넘기면서 전진하면 뒷톱은 따라가며 가지를 정리한다. 압톱이 자신의 작업장을 정리하기 위하여 톱을 돌리는데 풋내기가 그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병원에 가기 위해 산에서 내려가고 있었다. 뒤에서는 엔진톱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울어대고 앞쪽의 먼 산에서는 멧비둘기가 엇박자로 울고 있었다. 그는 내 어깨에 오른팔을 걸치고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고 나는 안전교육을 했기에 그나마 이 정도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차가 있는 데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우리 두 사람의 발길을 휘어 감듯이 대기가 눅눅했다. 건설 현장에서 좋은 공기 속에서 일하려고 올라온 그의 처지를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소장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산재로 처리할지 공상으로 할지 선택할 수 있으니 원하는 대로 하라며 설명을 해줬다. 공상은 회사에서 치료비와 일을 못 하는 동안 일당의 100%를 지급한다. 그러나 비가 와서 팀원 모두 일을 못 하게 되면 일당이 전혀 지급되지 않는다. 산재로 처리하면 근로복지공단이 치료비와 일당을 무조건 지급한다. 하지만 일당의 70%만 지급한다.

 

“어느 것이 유리합니까?” 그가 다시 물었다. 나는 산재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후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이득이 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그가 여기저기 전화해서 자문을 구했기 때문이다. 건설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인 것 같았다. 갑자기 종석이 생각이 났다. 우직한 종석이라면 어떻게 할까? 마침내 그가 말했다.

 

“공상으로 해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의사는 능숙하게 찢어진 곳을 꿰맨 후 일주일 후에 와서 뽑자고 했다. 우리는 병원 앞에서 헤어졌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병원을 다녀온 다음 날부터 일주일간 비가 내렸다. 종석이는 예상보다 일찍 돌아와 어머니 상태가 생각보다 좋고 일이 걱정돼 안 되겠더라고 말했다. 우리는 간신히 그 작업의 공기를 맞출 수 있었다.

 

 

사진제공=한국산림기술인회 정회원 이태익